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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Brand Story

ERL이 기억하는 캘리포니아

by 초예민 2026. 6. 26.

ERL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캘리포니아’다.

하지만 ERL이 보여주는 캘리포니아는 여행 안내서 속 풍경과는 조금 다르다.

이 브랜드가 그리고 있는 것은 디자이너 엘리 러셀 리네츠(Eli Russell Linnetz)가 직접 경험하고 기억하는 캘리포니아다.

그래서 ERL의 컬렉션은 트렌드를 설명하기보다 하나의 문화와 기억을 옷으로 풀어낸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사진가이자 영화감독이 만든 브랜드

ERL은 2018년 엘리 러셀 리네츠가 설립한 브랜드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보다 사진가와 영화감독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광고와 뮤직비디오, 아티스트 비주얼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미학을 만들어 왔고, 그 경험은 자연스럽게 패션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ERL의 컬렉션은 옷 하나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스토리가 먼저 기억에 남는다.

룩북과 런웨이를 보다 보면 각각의 착장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 하나의 장면처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접근은 일반적인 패션 브랜드와 ERL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ERL의 컬렉션에는 미국적인 요소가 자주 등장한다.

빈티지 그래픽, 컬러풀한 니트, 오버사이즈 패딩, 데님, 플리스까지.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런 요소들이 전형적인 아메리칸 캐주얼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ERL은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디자이너가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접했던 문화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한다.

그래서 컬렉션을 보다 보면 특정 시대를 복각했다기보다 여러 시기의 기억이 한 컬렉션 안에서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느낌을 받는다.


촌스러움과 세련됨은 공존할 수 있을까

ERL을 처음 접하면 다소 과감한 색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강렬한 컬러 조합이나 과장된 실루엣, 빈티지 기념품을 연상시키는 그래픽은 전형적인 럭셔리 브랜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컬렉션 전체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금은 촌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는 요소들이 하나의 룩 안에서는 의외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균형감은 쉽게 만들기 어렵다.

ERL은 촌스러움을 피하는 대신 그것을 새로운 미감으로 해석하는 브랜드에 가깝다.

그래서 컬렉션을 계속 보다 보면 처음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패션계가 주목한 이유

ERL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2022년에는 LVMH Prize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이후 디올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였던 김 존스와 협업을 진행하며 브랜드의 가능성을 더 넓게 보여줬다.

이런 성과는 단순히 화제성 때문만은 아니다.

패션계는 오래전부터 ‘미국적인 스타일’을 여러 방식으로 해석해 왔지만, ERL처럼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중심에 둔 접근은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ERL은 캘리포니아를 표현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한 사람이 기억하는 캘리포니아를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됐다.


유행보다 세계관이 먼저 보이는 브랜드

ERL은 매 시즌 크게 방향을 바꾸는 브랜드는 아니다.

대신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 간다.

그래서 최근 컬렉션을 봐도 초창기 ERL이 가지고 있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오버사이즈 실루엣과 선명한 색감, 빈티지한 그래픽, 미국적인 요소들은 여전히 브랜드의 중심에 있다.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기보다 자신만의 언어를 꾸준히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이런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ERL은 시즌이 지나도 쉽게 낡아 보이지 않는다.

 

패션 브랜드는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컬렉션 전체에서 일관되게 이어지는 브랜드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ERL은 옷을 통해 캘리포니아를 설명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엘리 러셀 리네츠가 기억하는 문화와 경험을 하나의 컬렉션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브랜드의 옷은 각각의 제품보다 컬렉션 전체를 함께 볼 때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

최근 패션 시장에는 레트로나 빈티지에서 영감을 얻는 브랜드가 많다.

그런 흐름 속에서도 ERL이 꾸준히 주목받는 이유는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ERL의 컬렉션은 매 시즌 새로운 제품보다 새로운 장면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